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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해] 시편3편 아침기도(개인 애가 & 신뢰시)

그일라 2019.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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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해] 시편3편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장르구분]

 

개인 애가 또는 신뢰의 시

 

이 시는 전형적인 개인 애가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애통해하며, 그러다 확신하다가 마지막에 기원합니다. 기원 다음에 서원까지 곁들여져 있기 때문에 개인 애가로 분류하는 것이 정당해 보입니다.

 

[강해]

 

시편3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다윗이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함으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건입니다. 나단은 다윗을 찾아와 ‘칼이 당신의 집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그로인해 암논 사건이 일어나고,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다윗을 반역하기까지 이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야할 부분입니다. 그렇다고 시편3편을 그러한 역사적 인관과계로만 보면 왜곡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찾는 적들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간구하는 모습을 통해 다윗의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개인 애가인 동시에 신뢰의 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내용을 따라 크게 세가로 구분했고, 세세하게는 네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주해와 강해는 네 단계로 구분해 하도록 하겠습니다.

 

1. 1-2 많은 원수들에 대한 깊은 탄식

[3-6 하나님을 신뢰함]

2. 3-4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확신

3. 5-6 평안한 마음으로 단잠을 취함

4. 7-8 적들을 보복해 달라는 간청

 

 

1. 1-2 많은 원수들에 대한 깊은 탄식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여호와를 부름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많다’는 표현이 세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대적이 많고, 나를 치는 자가 많고,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시인의 원수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원수들은 다윗을 찾고 죽이려 혈안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돌려 표현하면 ‘다윗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확신했던 이유는 있습니다. 먼저 대세가 기울었습니다. 아무리 다윗이라도 왕궁에는 압살롬이 있고, 다윗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린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이번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나단 선지자의 저주처럼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사람들은 나단의 저주를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윗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착각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누군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를 멸시하고 더 괴롭힙니다. 진정으로 그가 하나님께 고난을 받는다고 해도 그를 미워하거나 핍박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들이 해야할 일은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록 자신의 아들이 잘못하며 벌을 주었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아들을 괴롭히는 것을 기뻐하지는 않습니다.

 

2. 3-4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확신

 

1-2절에서 침울했던 다윗에게 갑자기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고백하며 확신하기에 이릅니다. 단지 두 구절에 불과하지만 1-2절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잠시 동안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 있었지만 다시 기운을 차리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과 함께 해온 여호와 하나님을 확신하기에 이릅니다.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은 세 가지입니다. 먼저는 ‘방패’, 두 번째는 ‘영광’, 세 번째는 ‘머리를 드시는 자’입니다.(3절) 방패는 전쟁에서 공격해 오는 적들의 무기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합니다. 현재 적들이 다윗을 죽이려하는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방패 되심은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다윗이 들었던 첫 번째 생각은 ‘하나님께서 나를 포호하고 계시는 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생각이 들자 그는 곧 평안해졌습니다. 두 번째 ‘나의 영광’은 회복의 의미입니다. 문법적으로 ‘내가 영광을 돌리는’의 뜻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문맥상 하나님께서 다윗의 영광을 회복시키는 것이 맞습니다. 영광을 회복한다는 말은 ‘명예와 평판’(김정우)을 의미합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의 자리에 올려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머리는 든다는 표현은 영광과 비슷한 의미로 회복을 의미합니다. 왕 앞에 나간 죄인은 머리를 숙입니다. 그런데 왕이 ‘머리를 들라’한다면 그것은 용서의 의미와 화해,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압살롬을 피해 급히 달아날 때 다윗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머리를 가리고 올라갔습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다윗의 머리를 들게 하심으로 구원하시고 명예를 회복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삼하 15:30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세 가지는 다른 표현이지만 의미는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실 것이고,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 이어 기도 응답의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2편에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셨습니다. 이제는 ‘그의 성산’(4절)에 계십니다. 성산은 예루살렘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다윗에게 ‘그의 성산’은 잃어버린 곳입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야 할 곳입니다. 다윗은 도망쳐 나왔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여전히 그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묵묵히, 변함없이 ‘그곳’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곳에 계실뿐 아니라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3. 5-6 평안한 마음으로 단잠을 취함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확신에 이르자 다윗은 드디어 육신의 평안을 얻습니다. 적들이 둘러쌓고 다윗의 생명을 찾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5절)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은 평안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최선을 행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적들을 모두 막을 수 없습니다. 마치 사도행전의 베드로처럼 달콤한 잠을 자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평안을 선물로 받습니다. 잠언 기자는 완전한 지혜를 소유한 자들에게 평온한 잠을 허락하신다고 말합니다.

 

잠언 3:23-24

23 네가 네 길을 평안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24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

 

다윗의 확신은 ‘천만인’이란 숫자에 있습니다. 적들이 ‘천만인’이 된다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원문(MT)에는 ‘많다’는 표현만 있을 뿐 실제의 ‘천만’이란 숫자는 없습니다. ‘진 친다’는 표현은 적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전문 군사 용어인 것을 감안한다면 실제로 다윗 주변에 다윗과 싸우기 위해 진을 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숫자로 볼 때 다윗의 군대로 비교할 수 없을 많았지만 다윗은 ‘두렵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진정한 용기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4. 7 적들을 보복해 달라는 간청

 

1절에서 ‘여호와여’를 외친 시인은 기도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여호와’를 부릅니다. 그러나 느낌이 너무나 다릅니다. 처음의 외침이 탄식과 아픔의 외침이었지만, 7절의 외침은 확신과 기쁨의 외침에 가깝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는 전쟁을 시작할 때 쓰는 전형적 군사용어입니다. 대체로 여호와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일어나 달라는 표현은 특별한 상황이며, 비상사태임을 말합니다. 지금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기 때문에 이 전쟁에 개입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일어나 달라는 곧 ‘구원 하소서’의 다른 표현입니다. ‘원수의 뺨’을 치는 행위와 ‘악인의 이를 꺽’는 것은 완전한 승리를 말합니다.

 

민수기 1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대’이며, 구름 기둥이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 움직여야 합니다. 이 때 여호와의 일어남은 하나님의 군대를 이끄는 전쟁의 시작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전사들은 항상 군인이 앞서지 않고 레위인들과 법궤가 앞서고 그 뒤를 군대가 따릅니다.

 

다윗은 7절 후반부를 과거형으로 사용합니다. 여호와는 ‘이미’ 자신의 원수를 쳐부쉈다고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얼굴은 그 사람의 전인격과 명예를 상징합니다. 뺨을 때림으로 그 사람을 무시하고 모멸합니다. ‘이’는 힘을 상징합니다. 이를 꺾음으로 상대의 힘을 완전히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계약을 깨뜨리거나 중요한 약속을 어길 때 법정에서 상대의 이를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완전하며, 원수들은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구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8절) 다윗은 예전에 골리앗과 싸울 때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삼상 17:47)고 외쳤습니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홀로 나간 요나단 역시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이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고 고백했습니다.(삼상 14:6)

 

나가면서

 

시편 3편은 절망에서 시작하여 희망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 중간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들어가 있습니다. 기도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기도 자체에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 가운데 발견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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