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역사] 5) 분열왕국 시대(B.C. 931-722)
[성경의 역사] 5) 분열왕국 시대(B.C. 931-722)
기원전 931년 솔로몬이 죽고 아들 르보호암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물려받지만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북쪽의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고 분리된다. 결국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분단된 형태로 마지막까지 가게 된다.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한다. ‘여로보암의 길’로 불리는 북 이스라엘 지파는 우상숭배로 인해 결국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다. 남유다는 다윗의 후손들이 왕이 됨으로 ‘다윗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우상숭배에 빠져 586년 앗수르를 멸망시킨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다. 70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기원전 516년 솔로몬 성전에 이어 두 번째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진다.
분열왕국 시대는 대체로 3시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시대는 극한 대립의 시기이니다. 두 번째 시기는 연합의 시기이니다. 세 번째 시기는 다시 대립의 시기입니다.
첫 시기: 대립의 시기(B.C 930-874)
솔로몬 이후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하여 열 지파가 찢겨져 나갑니다. 남유다는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열지파가 모두 여로보암의 편을 든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파에 속한 것도 아닙니다. 남유다에도 북지파에 속한 여러 지파의 소수가 섞여 살아갑니다. 또한 제대로된 땅을 얻지 못한 시므온 지파의 경우 대부분 남유다에 남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 10:2의 양상으로 결론 지을 수는 없습니다. 남과 북의 분립과 더불어 트랜스 요르단이라 하여 요단강 동편의 지파들은 또 다른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므낫세 반지파와 르우벤 지파가 그들입니다.
남유다의 왕: 르호보암-아비얌(아비야)-아사
북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나답-바아사-엘라-시므리-오므리-아합
이 시기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합니다. 초기에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을 군대를 이끌고 따라가지만 스마야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니 전쟁하지 말라는 말씀을 전합니다.(왕상 12:21-24) 그러자 르호보암은 전쟁을 멈추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전쟁이 멈추자 여로보암은 즉각적으로 남유다를 대항할 종교적 정치적 행정을 단행합니다. 그 첫 번째 행동이 바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드는 일었습니다. 레위 제사장이 아닌 뇌물을 받고 일반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우게 됩니다. 만약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드리러 가게 된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남유다로 향하게 되리라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을 시작으로 북이스라엘은 소위 ‘여로보암의 길’이라는 우상숭배의 길을 따르게 됩니다. 열왕기 기자는 이것이 여로보암의 집에 죄가 되어 그가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왕상 13:33-34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여러보암이 죽자 그 뒤를 따르는 왕들은 여로보암의 길을 걷게 되고, 더 악하고 심각한 죄를 짓는다. 정통성이 없는 북이스라엘은 신하가 왕을 죽이며 자신이 왕이되는 반란의 역사로 점철됩니다. 엘라가 죽자 시므리가 7일 동안 왕이 되지만 오므리가 디브니를 죽이고 북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오므리로부터 여호람까지 오므리 왕조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됩니다.
두 번째 시기: 연합과 평화의 시기(B.C. 873-841)
남유다: 여호사밧-여호람-아하시야-아달랴
북이스라엘: 아합-아하시야-여호람
아사가 죽고 아들 여호사바시 남유다의 왕이 됩니다. 북이스라엘은 아합이 왕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부터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평화롭게 지냅니다. 여호사밧 왕은 여호와를 섬기는 지극히 신앙적인 왕이었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평화를 위해 아합의 가문과 혼인하여 인척 관계를 맺습니다.(대하 18:1). 그 일로 인해 선견자 예후가 여호사밧을 찾아와 질책합니다.(대하 19:1-2) 아합 왕 때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호수아가 저주한 여리고성을 쌓습니다. 성경은 그가 터를 쌓을 때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성문을 세울 때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다고 말합니다.(왕상 16:34) 바로 이때 엘리야가 등장해 가뭄이 시작됩니다. 바알의 온상지인 갈멜상 정상에서 바울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합니다.(왕상 18장)
여호사밧이 죽고 아들 여호람이 남유다의 왕이 됩니다. 여호사밧은 경건한 왕이었지만 북이스라엘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 불가피하게 바알우상을 남유다에 다시 끌고 들어오는 계기가 됩니다. 여호람은 아합의 딸과 결혼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됩니다. 열왕기 기자는 그 이유를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왕하 8:18)기 때문으로 밝힙니다. 결국 여호람 이후 남유다는 영적인 퇴락을 거듭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람의 죽음 이후 아하시야가 왕이 되지만 어리기 때문에 어머니인 아합의 딸 아달랴가 섭정을 하면서 온갖 죄를 다 짓습니다. 후에 북이스라엘의 왕이된 예후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세 번째 시기: 대립의 시기(B.C. 835-722)
남유다: 요아스-아마샤-아사랴(웃시야)-요담-아하스
북이스라엘: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2세-스가랴-살룸-므나헴-브가히야-베가-호세아
이 시기에 북이스라엘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예후의 통치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던 아합 가문을 몰락 시켰고, 상당 부분 개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들 여호아하스는 다시 우상에 빠져들있고, 아람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합니다.(왕하 13장) 뒤를 이은 요아스는 유다왕 아마샤와 싸우고, 벤하닷을 무찌르지만 16년이라는 짧은 통치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2세가 왕이 되면서 북이스라엘은 멸망 직전 가장 화려한 시기를 맞이한다. 정치와 군사, 경제적으로 솔로몬 시대와 맞먹을 만큼의 부와 권력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그의 나라가 그리 멀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30년 후 북이스라엘은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갔던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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